2013.07.26
한국->아일랜드 여정 2
현재까지 진행 상황, 방만한 준비로 고국을 나섰던 그들은 얼마 가지 못해 공항 노숙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디디게 된다.
초짜였던 그들은 어둡고 따뜻하고 푹신한 그 어떤 곳을 밤새도록 찾아 헤매다가 차가운 나무 벤치 위에서 새벽 이슬을 맞았다.
새벽 05:10 기상, 잠에 굶주린 몸을 이끌고 나리타 공항을 향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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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을 통하는 지하철의 엘레베이터는 넓다. 플랫폼까지 편하게 큰 짐을 이동할 수 있었다.
곧 6시 25분이 되면 나리타 공항으로 떠나는 새벽 전철을 탈 수 있다.
'게이세이 스카이 엑세스 신형 스카이라이너'. 귀족 같이 긴 이름을 가진 그 노선은 환승 없이 45분, 한번에 우리를 나리타 공항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비행기는 오후 1시 반이다. 나리타 공항의 라운지는 아침 8시부터 열린다.
멍하게 쭈그려 앉아 있는 사이 남편은 그새 방향 확인을 마쳤다.
일본의 평일 아침 풍경은 참 신기하다. 한 무더기의 남자들이 같은 머리 스타일에 하얀 셔츠, 검은 바지, 검은 가방을 한 손에 쥐고 기차를 기다린다. 우루루 타고 우루루 내린다. 그 광경은 뭔가 슬프기도 하다. 너무 지쳐 침을 질질 흘리며 널 부러져 눈이나 겨우 뜨고 있어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아쉽다. 슬프다.
나리타 공항 겨우 도착!
일본은 공항마다 고유의 캐릭터가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도장도 있다. 포켓몬스터가 유행하고 있었던 시절에는 각 기차역마다 비치 되어있는 캐릭터 도장을 찍어 모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어서 놀랬던 적이 있었는데 공항도 이러고 있다니..
기념으로 노트에 찍어보았다. 잉크가 그럴 듯하게 잘 묻어 나와서 왠지 기분이 좋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오매불망 그리던 그 라운지 라슈란!
늘 라운지는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장소인 것 같았는데 내가 들어간다니 왠지 긴장, 두근두근
노숙은 했지만 거.. 거지는 아닙니다. 냄새도 좀 납니다만.. 내쫓지 말아주세요.
라슈란 라운지는 1인에 1000엔 씩 받고 있었고 이용 시간에는 제한이 없다.
티켓을 보이면 재 입장도 가능 하다. 단지 8시에 시작해서 8시에 마칠 뿐,
라운지 내부에는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자리와 읽을 거리, 다양한 음료가 준비 되어있다. 안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누울 수 있는 좌석이 있다. 4개 정도 있는데 그 중 가림 막이 있는 자리는 2개 뿐 이었다.
담요도 작은 것, 크고 두꺼운 것 두 가지가 있는데 모두 가져와서 덮을 수 있다.
그가 블로그에 나의 초 절정 내츄럴 사진을 골라 올렸으니 가려주는 친절함은 생략하겠다.
남편은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어째서 인지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짐을 다시 정리하며 나도 모르게 중얼중얼.. 왠지 모를 불안함이 엄습 해 온다.
우리가 쉬고 있던 자리 옆에는 분홍 기모노를 입은 여성을 그린 액자가 걸려있었다.
6년 전부터 언제고 가보자 했던 도쿄타워나 관람차 야경을 이번 기회에 가 보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아쉬웠다.
그저 여기까지라도 무사하게 잘 와서 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4시간 뒤, 정신을 잃었던 남편을 깨워 출국 수속을 밟으러 갔다.
들고 있던 가방과 외투를 모두 벗어서 심사 대 위에 올려 놓고, 용액 같은 물건 들은 지퍼 백에 담아 따로 제시 한다.
한국에서 나올 때 한 번 해봐서 나름 익숙하게 기본 동작을 실시 하였다.
뭔가 살벌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샅샅이 훑는다. 저..저희는 죄를 짓지 아니하였습니다. 보내주십시오.
이제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수속을 거치는 데 이곳 저곳 만화로 그린 안내 포스터가 눈에 띈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일본
식물 검역소의 반입 금지 항목을 만화로 그려 놓았다. 저기 과일, 야채 옆에 길쭉한 삼각 김밥 같은 게 뭔가 했더니 볏집 이란다.
뭐? 볏집을 누가 가지고 와?? 했더니 사료용으로 가져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각 나라마다 영수증을 증빙 하면 수입 가능한 과일 류도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다. 한국의 경우, 파인애플, 코코넛, 푸른 바나나는 모든 국가에서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이 쪽으로 ->http://ecustoms.tistory.com/1599
우리나라는 모델을 고용 해서 포스터를 만들고 일본은 만화 캐릭터를 고용한다. 2012년 7월 9일 부터 일본에서는 새로운 거주 관리 제도가 실시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집 남편은 먹을 것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
이야, 드디어 장시간 비행이 시작 되겠다. 이제 네덜란드와 일본 승무원이 우리의 비행을 돕는다.
그 말은 즉, 이제부턴 그나마 알아 먹을 수 있던 한문 권도 이제 안녕이라는 뜻,
탑승부터 문제가 생겼다. 우린 분명 붙어 있는 자리를 예약 했음 인데..
출발 몇 일 전에 KLM에서 전화가 와서 귀국 행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서 다른 비행기로 변경 될 거라고 하더니
설마 출국 행 비행까지 변경 되었던 건 가!
양 옆 자리로 일본 관광객 아줌마들이 자리 잡고 중간에 한 사람 씩 끼워 놓은 꼴이다.
여행사 직원이 호호호 하면서 아줌마들 기분을 맞추고 있다.
'손님들의 편의를 위하여 저희가 중간 자리는 쏙~ 빼놓고 예약했스므니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름 신혼에 장시간 비행인데 관광객 아줌마들 편의 봐주며 샌드위치가 되어야 하는 거냐?
승무원을 불러 안되는 영어로 손짓 발 짓 섞어가며 '우리는 막 결혼했고 예약도 같이 붙어 있는 것으로 예약 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냐.' 를 이해 시켰다. 승무원은 자리를 뜨더니 이내 난처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안된다고 한다. 모든 좌석이 만석 이란다. 이대로 가야한단다.
단거리 비행도 아니고 무려 10시간이 넘는 비행 좌석이 하필 이면.. 왜 이런 일이 생긴 건가. KLM 이랑 일본 아줌마들 여행사!!
너네 다 미워!
열 받은 것을 풀 길이 없다. 뵈는 게 없다. 나는 시방 옆도, 뒤도 안보이는 위험한 짐승이다. 그저 앞 만 보일 뿐,
앞 좌석에 붙은 스크린 모니터에 각 나라 별 언어 공부 프로그램이 장착 되어있었다. 영어를 조금 더 잘했으면 한 마디라도 말을 더 했을 텐 데. 그래, 이건 다 영어 탓이다. 이 분노를 영어 공부로 승화 시켜주마.
우후훗, 히히히 내가 좀 하는 것 같아. 영어 천재가 되어서 유럽 땅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아. 남편이랑 떨어져 있으니까 오히려 집중이 잘되잖아?
(그러나 현실은 중학교 영어 수업 때 놀아서 제대로 정립 못했던 숫자와 달력 개념을 다시 익히는 것 만으로도 벅찼다.)
그때였다.
저 만치 에서 다가오는 저기 저 아름다운 승무원은 천사인가요. 작은 와인 한 병을 까서 컵과 함께 승객에게 넘겨주는군요.
저.. 저건 누가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시방 저 같은 천민이 먹어도 되는 건가요.
오오오.. 기내식과 함께 하는 와인이다. 따끈한 빵도 따뜻한 물 티슈와 함께 건네준다.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받는다. 어찌 마다 하겠는가. 주는 건 다 받겠소! 이 비행기에서 뽕을 뽑겠소.
일본에 있는 내내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10시간 동안 내가 구입해서 먹은 것은 수입 된 생수와 한국산 초코렛 뿐, 언젠 가는 아이를 갖고 싶고, 그 아이가 건강하길 원한다. 알 수 없는 요소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라멘에 덮밥에 한정 없이 먹었을 텐데 이젠 그러기가 껄끄럽다는 게 참으로 아쉽다. 일본의 음식은 정말 맛있으니까.
기내식은 참아 넘기기가 힘들다. 너무 힘들었다. 전부다 먹기로 했다.
아이스크림과 생수가 나왔다. 아이스크림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정말 맛있다. 동시에 너무나 아쉽고 너무나 안타깝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데..
옆 자리 아줌마가 화장실을 간 틈을 타 중간 자리에서 탈출!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다가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또 다른 위로을 주문했다. 그것은 바로..
흐흐흐 나는 알고 있었다. 니가 컵라면을 준다는 사실을, 그것도 말을 해야 준다는 사실을,
갑자기 컵라면이 나오자 뒷 자석에 있던 남편이 당황한다. 내가 시킨 거야. 그냥 먹어 우하하하!
포만감과 함께 다시 잠들려고 노력했지만 힘들다. 비좁은 양계장에 있는 듯한 기분,
내가 자는 게, 자는 게 아니야. 잠이 들어도 어느 정도는 깨어 있는 반수면 상태, 3일 차 이러고 있다.
평안은 언제쯤 올 것인가.
그리고 그녀는 잠들었다..가 금방 깼다. 음악이 필요할 때이다. 비틀즈를 찾았다. 이제부터 무한 반복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젊고 생기 있던, 영원할 것 만 같던 그들은 세월이 흘러 이제 노인의 모습이 되었고, 존과 해리슨은 죽었다.
영원히 10대일 것 같았던 나는 이제 내년이면 30살이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19살, 등교를 하던 나는 인생 계획을 적어보라는 학원의 찌라시를 받고 장난 삼아 60살 까지 적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30 대가 될 나를 불쌍하게 여겼다. 엄청나게 우울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멀리 여행을 보내주고 싶어했다.
'29 세가 되면 어딘가 먼 곳으로..'
10년이 지나 지금, 정말로 먼 곳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고 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도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히히덕 거리던 10대의 모습, 모든 것에 걱정하고 우울해 했던 20대의 모습..
그리고 이제 곧 30대, 생각 만큼 우울하지 않다.
어디든 가보자. 겁 먹지 말자. 행복해지자.
그들이 말한 대로 내 인생 역시 짧을 테니까.
멀리 안내 음성이 들린다. 일본어다. 다시 영어, 그리고 네덜란드 어.
비행기가 흔들린다. 비행기 바퀴가 땅과 만나며 굉음을 낸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